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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표현주의 [Expressionismus]

by 마미레이첼 2023.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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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주의 [Expressionismus]

 표현주의는 20세기 초 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전개된 예술운동으로써 미술사와 미술비평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다. 미술의 기본 목적을 자연의 재현으로 보는 것을 거부하고, 르네상스 이래로 나타난 유럽 미술의 전통적 규범을 벗어나려 했던 20세기 미술 운동 중의 하나이다. 표현주의 특징은 영혼의 표현을 나타내는 것에 주력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작가 개인의 자아나 혼의 주관적 표현을 추구하는 “감정표출의 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 표현주의자들은 예술의 진정한 목적이 감정과 감각의 직접적인 표현이며 회화의 선, 색채, 형태 등은 그것의 표현 가능성만을 위해 이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구성의 균형과 아름다움에 대한 전통적 개념들은 감정을 더욱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해 무시되었고, 왜곡은 주제나 내용을 강조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이 운동은 회화에서 시작되어 다른 조형예술을 거쳐 문학 ·연극 ·음악에까지 미쳤으며, 특히 영화 분야에는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보면 1905~1930년대 사이의 시기이며 이는 세계 1차 대전이 시작되기 전과 4년간의 전쟁을 거쳐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의 시기이다.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이성과 과학을 앞세운 발전은 많은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엄청난 부패와 타락을 전쟁으로써 증명하게 된다. 처참한 당시 사회의 현실을 철저히 배제하고 타파하려 했던 혁명적 예술운동 중의 하나가 바로 표현주의였다. 표현주의를 특징짓는 강한 정신 체험, 가시적인 세계를 초월한 환상, 냉혹하고 잔인한 분석과 풍자는 위기의 시대 상황에 의해 변화된 개인의 미와 윤리가 받아들여진 데에 따른다고 볼 수 있다. 인상주의의 대표적 화가들인 고갱과 반 고흐의 그림은 표현주의의 선구가 된다. 이들은 이미 대상의 형태를 단순화시키고 색채를 사용하는 데에 있어 매우 간결하고 원색에 국한하고자 노력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표현주의의 화가들은 앞서 언급한 화가들의 특징을 이어받음과 동시에 나아가 자연 대상을 단순히 아름답게만 묘사하려는 영향 아래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표현주의의 가장 직접적인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노르웨이 태생의 뭉크는 불안, 공포, 애정, 증오와 같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을 격렬한 색채와 왜곡된 선으로 표현한 화가이다. 자신의 강박관념을 그림으로 나타내고자 한 뭉크의 작품은 특히 독일 미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표현주의는 1933년 나치에 의해 해체되기 전까지 다른 어떤 나라에서보다 독일에서 가장 큰 발전을 이뤘다. 표현주의라는 용어도 야수주의, 초기 입체주의와 모든 반인상주의를 표방하는 다른 여러 화가의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 독일 비평가들이 1911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다. 독일 표현주의 회화의 대표적인 그룹으로는 '다리파'와 '청기사파'를 꼽을 수 있다. 1905년 드레스덴에서 결성된 브뤼케파 일명 '다리파'는 독일 각지에 있는 젊은 세대가 널리 결집하기 위하여 다리를 건넌다는 뜻으로 이러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에른스트 키르히너, 에리히 헤켈, 카를 슈미트 로트 루프가 창립멤버로 활동 무대를 드레스덴에서 베를린으로 옮기며 오토 뮐러와 막스 페히슈타인 등이 합류되었다. 이 그룹은 독일 현대회화의 출발점을 이루었고 프랑스의 야수파와 북유럽의 뭉크에게 고취되었다. 하지만 구성의 조화와 장식성을 유지했던 야수주의와 달리 '다리파'는 형태와 색채의 왜곡을 통해 기존 질서에 대한 반항과 창작의 열망을 표출하였다. '다리파'의 중심에 있는 인물로는 원시적인 미술 양식과 격렬하고 화려한 색채로 대도시의 거리 풍경을 그린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이다. 키르히너는 1913년 '다리파'의 연대기를 써내며 자신을 다리파의 대표적 미술가로 기술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동료들과의 불화를 낳으며 '다리파'는 와해하였다. 1911년 뮌헨의 신예술가동맹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결성된 '청기사파'는 바실리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를 중심으로 한다. 말 그대로 푸른 기사라는 뜻의 '청기사파'는 앞서 언급한 두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중요했던 칸딘스키의 푸른색과 마르크의 말을 상징한다. 이 밖에도 파울 클레, 아우구스트 마케, 알프레드 쿠빈, 가브리엘레 뮌터 등이 있고, 후에 드레스덴의 '다리파', 베를린의 '분리파협회', 프랑스의 루소, 피카소, 브라크와 러시아의 말레비치 등을 추가하며 그룹은 확대된다. '청기사파' 미술가들의 예술 활동에 있어 통일된 강령이나 주제는 없었지만 모두 정신성을 표현하기 위해 원시미술과 중세미술을 참고하며 추상화의 방향으로 진전해 나갔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곧 현대 추상회화로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세계 1차 대전이 시작되며 '청기사파'는 자연 해산되는데 전쟁 시작과 함께 러시아 출신의 칸딘스키는 러시아로 압송되었고, 아우구스트 마케와 프란츠 마르크는 전쟁 중에 전사한다. 표현주의를 설명하는 데 있어 빠질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1910년 베를린에서 헤르바르트 발덴이 창간한 예술잡지 슈투름이다. 미술에서의 표현주의라는 명칭은 이 슈투름 지를 통해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원래는 문학비평에 중점을 두고 시작하였으나 오스카 코코슈카 및 '다리파' 작가들의 삽화와 목판화를 실으며 문예와 미술의 종합잡지로 그 영역이 확장된다. 1912년 3월 슈투름이라는 동명의 화랑을 열어 표현주의뿐만 아니라 입체파, 미래파 등에도 문호를 개방하며 당대의 혁명적인 예술가들을 규합해 전위의 거점이 되며 표현주의 확산에 중심적 활동을 전개한다. 후에 미술학교와 실험극장도 설립하며 새로운 예술 활동의 추진체가 되었던 슈투름은 세계 1차대전 이후 나치즘이 대두하며 1923년 폐간하게 된다.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로는 오스카 코코슈카 외에도 구스타브 클림트와 에곤 실레도 표현주의자로 간주한다.  표현주의 화가들은 세계 1차 대전 종료 후, 그룹을 다시 결성하지 못한 채 발흥된 나치즘 체제에 의해 ‘퇴폐예술’로 낙인찍히게 되었고, 이에 화가들은 개별적으로 힘든 창작활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어려움으로 인해 그들은 스스로 붓을 꺾고 예술 활동을 중단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프랑스 표현주의는 꿈속의 장면을 그린 마르크 샤갈이나 격한 감정을 표현한 카임 수틴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었다. 또한 네덜란드 화가 카렐 아펠 등에 의해 예술클럽 '코브라'가 결성되고 이들은 추상적 표현주의를 추구하며 추상표현주의로 가는 이정표가 된다. '코브라'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피에르 알레신스키가 있다. 신즉물주의로 알려진 독일의 새로운 리얼리즘을 전개한 게오르게 그로스와 오토 딕스는 초기 표현주의에서 고안된, 왜곡과 과장이 심한 작품을 그렸다. 
 표현주의의 여러 특징은 현대 미술에서도 많이 추구되고 있다. 추상미술 화법의 타시즘과 추상표현주의는 표현주의의 직속 후예라 할 수 있으며 많은 그룹이 그들의 방법을 지금까지도 따르고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표현주의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표현주의 (세계미술용어사전, 1999., 월간미술),  [위키백과] 표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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