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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입체주의 [Cubism]

by 마미레이첼 2023.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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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주의 [Cubism]

 입체주의는 1900~1914년 파리에서 일어났던 미술 혁신 운동으로써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예술 운동의 하나이다. 이 또한 표현주의와 마찬가지로 르네상스 이래로 자리 잡은 사실주의적 전통에서 해방한 혁명적 회화 운동으로 지칭되고 있다.
1907년에 파블로 피카소가 발표한 아비뇽의 여인들은 입체주의 최초의 작품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입체주의 또는 큐비즘이라는 용어의 시작은 1908년 조르주 브라크가 선보인 에스타크 풍경의 연작을 보며 앙리 마티스가 "작은 입체(cubic)의 덩어리"라고 평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큐비즘이라는 용어가 미술계에 통용되기 시작한 건 1909년 3월 '르 피가로'지의 기사를 통해 명칭이 공공연 해지면서부터이다.
 입체주의의 배경을 살펴보면 과거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자연에 대한 사실적 모사라고 생각했다. 화가들은 대상을 아주 정확히 화폭 안으로 옮기고자 오랜 세월 노력했다. 그러나 그 생각에 대한 믿음에 조금씩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그대로 실재하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고찰로 시작된 의심은 인간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이냐는 의문으로 대상과 화가 사이에 존재했던 역할에 미세한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균열은 19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활동한 프랑스 화가 폴 세잔에 의해 구체화된다. 세잔은 모네, 드가, 르누아르 등과 교류하며 인상파의 화풍을 따랐으나 후에 인상파를 떠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그는 화가의 오랜 임무였던 사실적 그림에서의 해방을 위해 "자연을 구, 원뿔, 원기둥에 의해서 다룬다"라고 말하며 소재의 근본 형태를 강조하며 세상을 기하학의 형태로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관점은 입체주의 초기에 큰 영향을 주게 되며 이 운동의 시조가 된다. 입체주의의 시작에 폴 세잔이 빠질 수 없이 등장하는 이유이다. 세잔의 예술에서 큰 영감을 얻은 피카소는 아프리카 조각의 조형미에 대한 영감을 더해 아비뇽의 여인들을 구상하게 된다.  가로세로 2미터가 넘는 거대한 화폭 안에 여자 다섯이 그려진다. 그들은 큰 눈과 정면의 모습에 옆모습의 코를 가진 기이한 형태, 오른쪽 여자들의 모가 난 얼굴, 몸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큰 발등으로 정상적인 모습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림의 대상들은 분해되며 수없이 많은 조각으로 나누어지고 그 조각들은 하나의 화면 속에서 여러 시점을 보여주기 위해 재구성된다. 이 그림은 앞서 500년을 지속해 온 단일 시점에 따른 원근법을 단번에 무너뜨렸다. 이 그림이 막 완성된 1907년 가을, 문학가이자 비평가였던 기욤에 의해 브라크와 피카소는 만나게 된다. 그때 브라크는 피카소의 작업실을 방문해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보게 되고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 충격은 브라크에게 도전 의식을 심어주며 야심 찬 변화를 시도하게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야수파 계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브라크는 에스타크에서 그린 풍경화들을 통해 세잔의 형태에 대한 관점을 연구하고 나아가 공간에 대한 자신만의 분석을 표현한다. 브라크는 에스타크 지방의 풍경화를 그리면서 대상을 입체적 공간으로 나누고 여러 가지 원색을 칠하여 자연을 재구성한다. 이처럼 대상과 배경이 되는 공간의 경계를 허물고 그 공간을 물질화하는데 몰두하였다. 서로 공통의 관심사를 갖게 된 두 화가는 1909년경부터 급속도로 가까워지며 서로의 작품에 대한 이해와 의사를 긴밀하게 공유한다. 이 둘이 가까워지게 된 이유 중의 하나에는 칸바일러의 역할도 컸는데 독일의 젊은 화상이었던 칸바일러는 그들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두 화가의 그림을 후원하는 대신 모든 그림을 자신의 화랑에서만 전시할 것을 약속받는다. 이러한 연유로 아비뇽의 아가씨들이 대중에게 공개된 것은 1916년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진다.
 입체주의의 발전은 총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908년에서 1909년 사이 이루어진 피카소와 브라크의 예술은 "자연을 구, 원뿔, 원기둥에 의해서 다룬다”라고 말한 세잔의 예술에서 영감을 얻어 대상의 존재성을 기본적인 형태와 양에 의해 포착하려고 했다. 이를 초기 큐비즘으로 나누어 본다. 이후 1910년부터 1912년에 걸쳐 대상의 형태에 점차 섬세한 면 분할을 행하여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고쳐보고, 이러한 갖가지 모습을 한 화면에 재구성하였다. 대상을 기호화하여 추상적인 선의 요소로 처리하며 색채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이 시기를 분석적 큐비즘 단계라고 한다. 1913년에서 1914년에 이르러서는 종합적 큐비즘 단계로 들어가는데 이 단계에서는 주로 피카소와 후안 그리스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앞선 단계의 분석적 큐비즘이 해체와 재구성 사이에서 현실감과 일상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를 회복하기 위해 실제의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한 트롱프뢰유 방식이나 파피에 콜레 등의 콜라주 수법이 도입되게 된다. 또한 분해된 대상의 각 부분에 의도적인 형태와 색채를 부여함으로써 기하학적 질서에 의한 장식 효과의 증대를 가져오게 된다.
 입체주의 운동에 있어 피카소와 브라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피카소, 브라크 등은 그들이 작업했던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 위치한 세탁선의 이름인 "'바토 라부아르' 그룹 또는 앞서 언급했던 칸바일러의 화랑을 중심으로 작업한다고 하여 붙여진 '화랑 입체주의자'로 불렸는데 이들 외에도 1911년 파리에서 결성된 입체주의 계열의 모임인 퓌토그룹이 있다. 이 그룹은 마르셀 뒤샹과 그의 형제들을 비롯해 장 메챙제, 알베르 글레이즈, 페르낭 레제, 로베르 들로네와 후안 그리스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퓌토에 있는 뒤샹의 아틀리에에서 모임을 가졌고 그 지역의 이름을 따 "퓌토 그룹'으로 불리었다. 퓌토 그룹은 피카소와 브라크의 정통 입체주의를 거부하고 황금비율로 대표되는 기하학적 원리를 중요시하며 '섹시옹 도르'라는 전시회를 개최하고 그들 자신을 '섹시옹 도르파'라고 지칭하였다. 또한 살롱을 위주로 활동하며 '살롱 입체주의자'로 불리기도 했다. 이들은 정통 입체주의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였지만 기하학적 면 분할을 통해 형태를 사물의 본질로 여기며 활발한 활동을 하였고, 그들로 인해 입체주의는 발전과 확산을 이루게 된다. 이 그룹의 모임은 1914년 세계 1차 대전의 발발로 중단되게 되었다. 
 입체주의 운동은 세계 1차 대전으로 인해 좌절되었지만 이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수많은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열어 보였고, 이들의 시도는 미래주의, 순수추상, 다다이즘 등 이후에 출현하는 대부분의 미술 사조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그 성과는 20세기의 미술, 디자인, 건축 등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큐비즘 (미술대사전(용어 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입체주의 (세계미술용어사전, 1999., 월간미술), 파블로 피카소 - 20세기를 대표한 입체파 화가 (인물세계사, 장석봉), [위키백과] 표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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